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소보 전쟁 (문단 편집) == 서방의 개입 == || [[파일:코소보 F-117.jpg|width=100%]] || || [[이탈리아]] 아비아노 공군기지에 이륙하기전 활주로로 이동하는 [[F-117]] 나이트호크 || || [youtube(ulPsNrMMZ3E)] || || 1999 - 코소보 전쟁과 인종 청소에 관한 [[다큐멘터리]] || || [youtube(PbP2tKR-goQ)] || || 유고슬라비아군 주둔지에 떨어지는 미군 [[B-52]] 폭격기의 융단폭격 || || [youtube(cTllSoTRyco)] || || [[베오그라드]]가 폭격 받는 영상 || >술집으로 개조한 배 뒤쪽 갑판에 놓인 소파에 푹 파묻혀서, 나는 가까이 다가온 [[유고슬라비아]]의 해안을 보고 있었다. 코소보 전투는 끔찍스러운 상처를 매일 만들어내고 있었다. 저녁을 먹는데 종업원이 소리를 질렀다. 우리는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. 어둠 속에서 긴 불꽃이 이어지더니 연기 기둥이 솟아올랐다. 죽음의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[[NATO]]의 함선에서 쏘아올린 미사일이 [[세르비아]]에 떨어진 것이다. >---- >베르나르 올리비에(Bernard Ollivier, 1938–) 이러한 코소보에서의 전쟁상은 국제사회와 서방세계를 다시금 경악시켰다. 같은 해 6월 미국과 유럽연합은 코소보 전쟁에 대한 개입("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인 개입방안")을 선언하고 신 유고 연방군의 코소보 철수와 학살 중단을 촉구했다. 그러나 세르비아는 이를 무시하고 1998년 8월 코소보 해방군의 주요 거점지들을 함락했다. 결국 같은 해 10월 [[북대서양 조약 기구]](NATO)는 세르비아에 대한 무력사용을 결정하였다. 큰 역할은 아니었지만 [[독일 연방군]]도 참전하여, [[제2차 세계대전]] 이후 첫 해외파병 기록을 세웠다. || [[파일:NatoBomben_Belgdrad_ccKopie.png|width=100%]] || [[파일:NATO 세르비아 공습(2).jpg|width=100%]] || || [[파일:NATO 세르비아 공습(3).jpg|width=100%]] || [[파일:NATO 세르비아 공습(4).jpg|width=100%]] || 이듬해 [[1999년]] 3월 24일 [[나토의 유고슬라비아 공습|신 유고 연방 세르비아 공화국에 대한 공습]](일명 얼라이드 포스 작전)에 나서면서 전세는 세르비아에게 불리해졌다. 몬테네그로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몬테네그로군 역시 일부 코소보에 참전했기에 NATO는 [[포드고리차]](4차례)와 [[체티네]](2차례)도 6차례 폭격하였다. 체티네 폭격이 끝난 이후 몬테네그로는 전쟁에서 완전히 이탈하여 NATO에 항복했다. [include(틀:상세 내용, 문서명=나토의 유고슬라비아 공습)] 그러나 전쟁의 예상은 미국과 NATO가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. 원래 NATO의 계획은 3-4일, 아니 길어도 1주일 폭격으로 세르비아를 회담장으로 끌어내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. 문제는 몬테네그로와는 달리 폭격을 당해도 세르비아가 버틴다는 것이었다. 게다가 작전 중 초기 상당 기간이 악천후라 제대로 된 폭격작전이 힘들었고, 설상가상으로 [[F-117]] 나이트호크가 격추되는 망신까지 당했다. 한편 코소보 전쟁 당시 그 파일럿과 그를 격추시킨 사람이 서로 만나서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. [[http://www.bbc.com/news/world-europe-20209770]] F-117기 격추 후 파일럿 구출작전은 노 맨 레프트 비하인드 4부(내셔널 지오그래픽)에 당시 파일럿 본인이 나와 정황을 설명한다.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. 단, 파일럿과 격추시킨 사람간에 대한 언급은 없다. 작전 중반 이후 기상이 좋아지면서 공습량도 증가했으나 여전히 세르비아는 버티기로 일관했다. 설상가상으로 [[북마케도니아]]에 주둔하던 미군 3명이 순찰 중 유고군에 생포, 유고-세르비아 방송에 초췌한 모습으로 그대로 공개되어 NATO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. NATO군은 알바니아에 처음에 1천명, 나중에 8천명을 더 상륙시켰고 4월 말에는 [[영국군]] 4만명이 코소보에 파견되었다. 또한, 선전 방해 및 [[유고슬라비아군]]의 통신 체제 파괴를 위해 벌인 [[나토의 세르비아 방송국 폭격]]에 대해 [[프랑스]]가 [[미국]]에 크게 반대하면서 서방 주요국 사이에서도 갈등이 생겨났다. [include(틀:상세 내용, 문서명=나토의 세르비아 방송국 폭격)] 이렇게 되자 미국은 [[핀란드]] 대통령과 함께 미국 외교관을 특사로 러시아에 파견하여, 다시 옐친을 압박했다. 당시 러시아는 암울한 시기라 국력이 밀렸던 옐친은 이번에도 미국이 원하는대로 밀로셰비치를 압박해 회담장으로 끌어냈으며, 6월 종전이 이루어졌다. 이 경우에도 러시아군이 종전 직후 세르비아의 후견인으로 파견되어 코소보에서 UN군과 함께 평화유지 임무를 수행했다. 그러나 옐친은 NATO군의 알바니아 상륙에 대해서 [[3차 세계대전]]을 경고하는 등 나름의 불쾌함을 처음부터 드러내고 있었고 최소한의 명분은 보장할 수 있었다. 실제로 종전 다음날 러시아군이 통보 없이 세르비아에 진주한 것은 좀 논란거리가 되었다. 공습은 총 78일간 실시되었고, 코소보 지역에 주둔하던 세르비아 제3군단의 안전한 철수가 보장되었다. 이 와중에 NATO는 자신들이 폭격 동영상까지 공개하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것과 달리 상당수의 [[기갑]]차량과 [[항공기]]가 생존해 세르비아로 철수하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. 이는 세르비아 측이 공습에 대비해 상당량의 [[디코이]]들을 만들어 노출시킴으로써 폭격의 피해를 줄인 것도 한 몫 했다.[[https://m.blog.naver.com/minjune98/221140084007|#]] 이후 폭격 성과에 관해 논란이 생긴 것은 당연했다. [[미국의 중국 대사관 폭격]] 사건으로 인해 [[중국]] 대사관 직원 3명과 코소보 난민들(100여명)이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. 해당 사건에 대해서는 최근까지도 중국인들이 미국을 비판할 때 심심치 않게 언급될 만큼 중국 내에서의 파장이 상당했다. 중국 내에서는 이 사건이 오폭이 아니라 미국의 고의적인 공습이라고 믿는 경우가 상당하다. 사건 자체는 미국의 배상과 중국의 반미 시위에 대한 미국 재산 피해에 대한 상호 배상으로 종결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